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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AMA REVIEW

[장면리뷰] 구미호뎐 - 생활이 된 기다림 속으로

by _슬 2020. 10. 13.


여우누이의 목숨을 거둔 이연은 어딘지 마음이 무겁다.

여우누이는 인간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했다. 인간으로 살고 싶다고. 기회를 달라고. 그녀의 말은 진심같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먼 과거부터 인간으로 둔갑해서 아버지와 형제들의 간을 파먹고 산 여우누이를 살려둘 수는 없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목숨을 사랑하는 남자의 앞에서 거둔 것에 대해서 별 가책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 그녀의 소원대로, 남자에게서는 여우누이에 대한 좋은 기억을 모두 지워버렸으니까. 여우누이는 죗값을 치렀고, 남자는 새로운 삶을 살 것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녀가 남긴 말들은 계속 이연의 머리를 어지럽게 울린다.



“너도 인간을 사랑한 적이 있잖아. 나 이해하지, 어?”



그 말은 단 한번도 잊은 적이 없던 한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긴 시간 이연은 산신의 지위를 포기하고 내세입국사무소의 일을 도우며, 단 한사람을 기다려왔다. 오래 전 아프게 보내야 했던 사람. 언젠가 다시 태어난다면 꼭 찾겠노라고 약속을 건넨 사람. 이연은 여우이다. 단 하나의 짝에게만 마음을 허락하는 여우. 그래서 긴 시간 이연은 그 약속을 위해, 단 하나의 짝을 되찾기 위해 이 쓸쓸한 생을 버텨왔다.



tvn<구미호뎐> 1회 tving 캡쳐


그렇게 벤치에 앉아 사색에 잠긴 그의 앞으로 웬 여자아이가 지나간다. 앞서 걷는 엄마를 따라가던 아이는, 저도 모르는 사이 손에 쥔 풍선을 놓친다. 포르르 날아가는 풍선을 바라보는 아이의 눈에 어느 새 눈물이 고인다. 이연은 그 모습을 보다가, 이내 풍선이 날아간 방향을 향해 손을 뻗는다. 저만치 날아가던 분홍색 풍선이 다시 포르르르 이연의 손으로 돌아온다. 이연은 그것을 다시 아이에게 건넨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울먹이던 아이는 어느 새 이연을 보며 환하게 웃는다. 이연에게는 별 것 아닌 일이 인간들에게는 종종 기적이 되곤 한다. 이연은 아이의 웃는 얼굴을 보며 얼핏, 함께 미소짓는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건넨 아이는 뽈뽈뽈 제 엄마를 따라 달려간다.


그 때, 뒤에서 이 광경을 다 지켜보고 있던 또 다른 아이가 이연에게 다가온다.



“아저씨 외계인이에요?”
“아니.”
“그럼 뭐에요?”
“구미호.”



이연의 능력을 보고 신기해서 이것저것 묻는 아이에게, 이연은 무심한 듯, 귀찮은 듯, 그래도 꼬박꼬박 대답해준다. 어차피 아이가 어디가서 구미호를 만났어! 라고 떠든다 한들 믿어줄 어른은 없을 것이다. 먼 과거에 산신도 있고 구미호도 있고 요괴도 있었던 시절을 기억하는 인간은 이제 별로 남아있지 않으니까.

아이는 똘망똘망한 눈으로 계속해서 이연에게 묻는다.

tvn<구미호뎐> 1회 tving 캡쳐



“그럼 백 살 넘었어요?”
“천 살도 넘었지.”
“근데 여기서 뭐해요?”
“……그냥, 누구 기다려.”
“누구요?”
“첫사랑.”



첫사랑. 이연은 단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다. 자신이 여기에 왜 있고, 아직까지 견디고 있는가에 대해. 기다리는 일은 이제 아프거나 슬픈 일조차도 아니다. 아음이 떠난지는 몇 백년이 지났고, 그 사이에 이연의 기다림은 일종의 습관이나 생활이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애틋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습관이 되고 생활이 된 기다림 속에서 그리움만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몇 번이고 그녀와 닮은 얼굴을 따라갔다가 실망을 반복하는 동안 아팠던 기억 역시 이연 안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아이는 백 밤을 자도, 천 밤을 자도 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이연을 바라본다. 어린 아이의 무구한 눈으로 보기에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이연은 안쓰럽다. 내가 친하게 지내줄까요? 아이가 묻는다. 그러나 이연은 단번에 아니, 라고 거절한다. 그는 코흘리개와는 친구하지 않는다고 말을 자르지만, 사실 인간과 친구를 하지 않는 이유는 따로 있다.



“나랑 친구 먹기에 인간 수명, 너무 짧고.”



아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이연을 올려다본다. 말간 눈 안에, 긴 시간을 살아온 이연이 고스란히 비친다. 영원에 가까운 삶을 살아온 구미호에게 인간의 생은 너무도 짧다. 이연이 살아온 생, 앞으로 살아갈 생에 발끝조차 미치지 못하는 시간을 살고 나면 인간은 세상을 떠나야 한다. 이 아이 역시 그럴 테다. 길어야 100년도 채 안 되는 삶을 살다가 삼도천을 건너고 말겠지. 그러나 이연을 보는 아이의 얼굴은 아직 죽음과는 너무도 무관하다. 희고 투명한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이연은 저도 모르게 싱긋 미소짓는다.




“인생 짧다는 소리야. 그러니까 사느라 애는 쓰되, 견디기 힘든 거 굳이 견디려고 하지마. 견디기 힘든 사람. 사랑. 기타 등등.”


tvn<구미호뎐> 1회 tving 캡쳐


자리에서 일어나며 오케이? 하고 되묻자 뒤에서 곧장 오케이! 하는 쨍쨍한 목소리가 돌아온다. 이연은 아이가 자라면서 이 짧은 순간을 금방 잊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 대부분의 존재는 생을 살아가는 동안 많은 기억을 잊어버리니까. 그러나 자신이 남긴 말이 아이의 어딘가에 남을지도 모른다는 것 역시, 이연은 알고 있다. 때로 아주 찰나에 불과한 순간이 긴 세월 잊히지 않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 아음을 만난 후 이연의 생이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아이를 뒤로한 채, 이연은 다시 터벅터벅 생활같은 기다림 속으로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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