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꽤나 가까이 서 있어도 전혀 낯설지 않은 공간이 있다.
때때로 우리는 출근길 전철에서 한 시간이 넘도록 누군가와 나란히 서 있다. 매일 비슷한 칸에 타는 루틴을 가졌다면, 매일 비슷한 얼굴들을 일정한 시간 마다 마주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의 이름은 모르지만 당신이 내리는 곳은 알고, 당신이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는 모르지만 자주 들고 다니는 가방은 어렴풋이 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서로를 알고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는 그저 스치는 사람들에 불과하고, 당신이 내리는 역의 이름을 알지언정 당신이 사는 지역의 이름을 나는 모른다.
미정은 그렇게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무수한 '당신'이자, 당신을 모르는 '나'의 얼굴을 하고 있다.
대체로 그녀는 모든 풍경에 꽤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어떤 상황이 닥치면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 알고 있다고 해야할까. 전혀 튀지도 않고, 어쩌면 배경과 하나된 듯한 색채로 그녀는 그 자리에 있다. 한 배에서 나온 창희와 기정이 나름의 방법으로 자기 삶을 한탄하거나 불만을 토로할 때에, 미정은 그저 옆에서 조용히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다. 이미 현실을 오롯이 받아들이고, 받아들인만큼 체념한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태도랄까.
서울에서 태어났다면 삶이 달라졌을 거라 말하는 창희에게, 미정은 그랬더라도 자신은 크게 달라지는게 없었을 것 같다고 답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자신의 삶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기정이나 창희처럼 제 결핍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자신의 무엇이 문제인지 미정도 잘 안다. 혼자여서가 아니다. 쓸쓸해서가 아니다.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라...... 도무지 채워지지 않는 갈증 때문이다.
타인에게서 충분히 인정받고 지지받는 느낌이 있다면, 그래서 나로서도 충분한 사람으로 채워진 채 자랐다면 아마 온 몸이 텅 빈 것처럼 공허하지는 않았을 테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온전한 관심을 받아본 적이, 오롯이 수용되고 인정받는 경험을 해 본 적이 미정에겐 없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예쁘지만 전체를 놓고 보면 평범하다는 회사 동료의 평가처럼, 미정은 늘 그 자리에 '평범하게 존재하는' 사람으로 머물러왔다. 어떤 지점에 데려다놓아도 자기 역할을 충분히 다 해내지만, 그렇다고 뚜렷한 색채가 드러나지는 않는 그런 사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드라마틱한 변화를 기대했던 것도 아니다. 다만 한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미정은 늘 생각했다. 나를 이해해주고 수용해주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아끼고 지지해주는 단 한 사람. 그 마음만 있다면 남들에게야 스쳐가는 배경 중 하나가 된다고 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감추려고 해도 자꾸만 드러나는 가난도,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 어색한 내성적인 성격도... 그 단 한사람만 있다면 왠지 다 괜찮아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미정을 기다리는 건 그 간절한 단 한사람이 아닌, 예기치 못한 배신과 빚, 그리고 언제든 나를 업신여길 준비가 된 사람들 뿐이다. 그나마 마음을 터놓을 곳은 동네 친구들 뿐이지만, 그들에게조차 미정은 자신의 가장 내밀한 욕망과 고민들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지는 못한다. 나도 인정받고 싶어. 나도 사랑받고 싶어. 나도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지고 싶어. 누군가가 나를 생각해준다면 좋겠어..... 하는. 어쩐지 입 밖으로 꺼내놓으면 더욱 허무해질 것만같은 그런 이야기들을.
희한하게도 오히려 미정이 보다 편안하게 자기 얘기를 꺼낼 수 있는 상대는 구 씨다. 어디서 흘러왔는지 모르는, 조용히 나타나서 가만히 일을 하다가 온종일 술이나 퍼먹으며 세월을 보내는,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남자. 누가 봐서도 안되는 우편물을 구 씨에게 맡길 수 있었던 건, 구 씨가 누구와도 접점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어디에도, 누구와도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미정은 오히려 그에게 솔직할 수 있다. 누구에게도 들켜선 안되는 우편물처럼 꽁꽁 싸매고 있던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있는 그대로 터뜨릴 수 있다. 단 한 번은 텅 빈 나를 누군가가 들여다봐줬으면 하는 바람. 속이 텅 비어 누군가 톡 건드리기만 해도 챙강 소리가 날 것만같은 이 안에 누군가 자신의 마음을 오롯이 부어주었으면 하는 욕망.
전철에서 스치는 수 많은 사람들. 얼굴은 알지만 이름은 모르고, 어디에 내리는지는 알지만 어디에 소속된 사람인지는 알 수 없던 사람들. 나의 생김을 알지만 나의 괴로움도 아름다움도 전혀 알지 못하는 완전한 타인들. 도저히 그 사이에서 외로움을 참을 수 없던 밤, 미정은 그 모든 문장을 거꾸로 외듯 구 씨에게로 향한다. 나는 당신의 이름은 모르지만 얼굴을 알아.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성실한 사람이란 건 알아. 성실하게 일하는 당신은 일마저 사라진 겨울엔 그저 내내 집에 들어앉아 술이나 퍼마시며 인생을 갉아먹겠지. 그래, 나는 당신이 어떤 상처를 가졌는지는 모르지만, 틈만 나면 자기 인생을 망가뜨릴 준비가 된 당신에게 '할 일'이 필요하다는 건 알아.
"당신은 어떤 일이든 해야 돼요.
난 한 번은 채워지고 싶어.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사랑으론 안 돼. 추앙해요."
누구에게도 들켜선 안되는 채무를 당신은 알게된 것처럼, 나도 모르는 새에 내가 스스로에게 빚져 텅 비어버린 마음도 당신이 알아달라고. 어차피 망가지는 것에 인생을 부어버릴 거라면, 차라리 그 마음 전체를 오롯이, 텅 빈 나에게 쏟으라고.
* 본 리뷰는 필자의 감상을 바탕으로 쓰였습니다.
* 본 리뷰에 인용된 작품관련 사진 및 대사의 저작권은 해당 작품의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DRAMA REVIEW' 카테고리의 다른 글
[드라마리뷰] 나의 해방일지 5회 6회 - 오늘 하루를 견디도록 하는 힘은 (2) | 2022.05.04 |
---|---|
[드라마리뷰] 나의 해방일지 3회 4회 - 나는 어디에 묶여있는 사람일까? (0) | 2022.05.03 |
[드라마리뷰] 내일 - 우리에게 아침을 선물하는 건 (0) | 2022.04.25 |
[장면리뷰] 구미호뎐 - 생활이 된 기다림 속으로 (0) | 2020.10.13 |
[장면리뷰] 경우의 수 - 바람은 돌아오려고 부는 것이다 (0) | 2020.10.0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