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제 퇴근 시간. 하루를 잘 마쳤다는 개운함과 약간의 피곤함으로 터덜터덜 늘 걷던 길을 걸었다. 평소와 크게 다를 게 없는 날이었는데, 이상하게 어젯밤에는 유독 내 앞을 앞서가는 한 소녀의 뒷모습이 계속 눈에 밟혔다. 소녀가 특별해서는 아니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단정한 긴 머리, 까만 집업 위에 슬링백 가방 하나를 두르고 운동화를 신은 소녀는 그냥 딱 그 또래의 아이들처럼 보였다. 훌쩍 다가온 초여름의 선선한 바람과 어둑해지기 시작한 주변의 저녁 풍경 때문이었을까. 늘 보던 배경에 서 있는 평범한 뒷모습이 어제는 왠지 아련히 마음에 와닿았다.
어쩌면 뭔가 그리웠던 걸까.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문득 이 드라마의 한 장면이 떠오른 건 그런 아주 사소한 순간 때문이었다. 주로 나는 '너무 좋다'고 느끼는 장면일수록 리뷰를 쓰기 어려워한다. 글로 기록되는 순간 나의 좋았던 감정이 문자에 한정되고 때로는 일정 부분 왜곡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해방일지>의 8회의 엔딩을 보고 마음이 쿵 내려앉았는데도 한동안 리뷰를 쓰지 못했다. 구 씨가 미정에게 남긴 대사가 이렇게나 마음을 건드려놓았는데도.
"가끔 그런 생각 들어.
세살 때, 일곱 살 때, 열아홉 살 때...
어린 시절의 당신 옆에 가 앉아서
가만히 같이 있어주고 싶다. "
"있어주네, 지금."
"......?"
"내 나이 아흔이면,
지금이 어린 시절이야."
이전에 구 씨는 사진 속, 계단 앞에 혼자 앉아있는 미정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었다. 그리고 8회의 엔딩, 두 사람은 똑같은 풍경 앞에 나란히 앉아있다. 어쩌면 '당신의 유년'에 함께 앉아주고 싶었던 건 미정의 마음만이 아니었을 테다. 혼자 동그마니 놓여있던 미정의 유년에, 오롯이 채워진 적이 단 한번도 었었다는 미정의 모든 시간에 구 씨도 그렇게 나란히 앉아있어 주고 싶었건 아닐까.
혹 아주 먼 훗날 돌아볼 '우리의 나날'은 쓸쓸하지 않도록.
가끔 나는 그런 생각을 한다. 나의 모든 것은 이미 결정되었다고. 한창 자라고 변화하던 시간을 지나 이제는 형태를 갖춘 어른이 되었고, 만들어진 이 모습은 돌이킬 수 없다고. 부족한 부분은 덜 자란 채, 뿌리 한 쪽이 텅 비어버린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채. 나는 이제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고.
어떻게 보면 그건 스스로에 대한 긍정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긍정이 가끔은 좀 서글프기도 하다. 다가올 내일에 대한 기대를 저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내일이 와도, 사랑을 해도, 그 무엇도 나를 변화시키거나 채워줄 수는 없을 거라는. '현실적이다' 말이 대체로 부정적으로 쓰이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사는 동안 뭔가가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어떤 순간에는 과거에 가졌던 영롱한 꿈이 텅 빈 구슬처럼 바래져 가기도 하니까.
잔잔했던 드라마의 1회에도 괜히 마음이 갔던 건 그런 이유였다. 창 밖을 바라보는 미정의 눈이, 주변 사람들을 대하는 미정의 태도가 왠지 그 '텅 빈 구슬'인 것만 같았달까. 언젠가 반짝있던 것들이 있었을테지만 어느 순간 그런 것들이 사라진, 내지는 침묵과 함께 그 빛을 잃어버린. 그래서 하루하루 굴러가는 것 밖에는 할 수 없는 그런 시선. 드라마를 보면서 미정을 응원하게 되는 건 어쩌면 그 공허한 눈빛이 채워지길 바라는 마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텅 빈 구슬 속을 다시 색색의 빛으로 가득 채워가는 미정을 보면서 위로받고 싶어서. 뿌리 한 쪽이 텅 비었더라도, 우리가 맺을 열매는 보다 빛나는 것일 수 있다는 희망을 얻고 싶어서.
나는 어른이고, 나의 형태는 결정되었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내가 싫지 않다. 하지만 믿고 싶다. 나는 다 자란 나무이지만, 모든 계절 다른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뿌리 한 쪽이 모자라도 열심히 빛을 향해 손을 뻗으면 지난 계절보다 나은 열매를 맺을 수도 있다고.
이미 좋은 계절은 다 지나가버렸다고 당신은 생각할지도 모른다. 물론 앞으로 다가올 계절들이 지나온 계절보다 나을 거란 약속은 누구도 할 수 없다. 하지만 단 한 가지는 확실하다. 세상에 똑같은 계절은 없다는 것. 지나온 계절들로 절대 다시 돌아갈 수 없듯, 다가올 계절들도 그 순간 뿐인 유일한 시간이다. 지금 지나고 있는 이 계절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게 우리가 이 계절을 잘 살아내야 하고 다가올 계절들을 고대해야하는 이유이다. 지금 보내는 시간이 어떤 추억이 될지 모르고, 다가올 시간에 누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까.
긴 시간이 흘러 돌아보면, 우리 그 때 참 젊고 아름다웠다고 추억할 날이 올 테다. 텅 빈 나의 마음을 채워주고자 했던 누군가의 온기가 그 때의 나를 미소짓게 할지도 모른다. 저만치 하늘에 뜬 무지개를 볼 때면 떠오르는 사람.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꼭 전달해주고 싶은 한 사람. 먼 훗날 돌아본 나의 긴 유년에 앉아있어줄 한 사람. 그게 누구라도, 우리의 삶에 그런 사람이 존재하길 바란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희망한다. 여기에 없다면 분명 어딘가에 있길. 거기에서 꼭 기다려주길. 미정의 상상처럼 이 소망 역시 현실이 되길.
* 본 리뷰는 필자의 감상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 본 리뷰에 인용된 드라마 관련 사진 및 대사의 저작권은 해당 작품의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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