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재는 이 '바닥'의 생리를 깊숙이 아는 사람이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인간들의 속내에는 더러운 진창이 숨어있다. 다들 짐작한다고 말하겠지만, 현실은 늘 그 이상이다. 수재는 그 '이상'의 세계가 얼마나 처절하고 고통스러운지 안다. 철 없던 한 때, 그들이 만든 진창에 온 몸으로 굴러봤으니까. 적어도 그들에게 진심이 있을 거라고 믿었던 순진했던 때에. 그 믿음으로 따뜻한 뭔가를 꿈꾸기도 했던 오래전 그 때에.
떠날 수 있었다. 도망칠 수 있었다. 사라질 수 있었다. 그러나 수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제 인생을 바닥에 내친 자들에게, 주제를 모른다고 함부로 떠들어댄 자들에게 다시 돌아왔다. 돌아온 대가로 그들은 부와 명예를 약속했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것들을 누리게 해주겠노라고. 물론 그 말을 믿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되고 말 것이었다. 다시 돌아올 때 그렇게 결심했으니까. 이 세계의 끝까지 한 번 올라서 보겠다고.
가장 위에 서서 보이는 풍경이 무엇일지 아직 수재는 모른다. 그 풍경에 대한 기대가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떤 아름다움을 누리고 싶어서 택한 길이 아니다. 다만 밟히지 않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자신을 짓밟은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가장 거대한 복수가 무엇인지 알았기에 택한 길이었다. 그렇게 무시했던 내가 결국 너희보다 위에 서는 것. 범접할 수 없는 곳까지 올라가서, 끝내 너희를 내려다보는 것.
그렇다고 해서 사람의 본성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아는 사람들은 안다. 독하게 구는 수재의 안에 여전히 따뜻한 성정이 숨어있다는 걸. 하지만 뭐라고 할까. 이제 그 따뜻한 세계에는 물기가 하나도 없다. 따뜻하고 풍요롭던 수재의 세계는, 이제 따뜻하지만 물기 하나 없이 바싹 메말라있다. 가끔은 자기 스스로조차 목이 말라 어찌할 줄 모를 정도로.
그런 수재에게, 조건없이 자신을 '믿는다' 말하는 공찬은 꼭 단비같았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드라마가 재미있는 것과 별개로, 두 사람 사이의 감정선이 초반부에 지나치게 급격하다는 느낌을 좀 받았었다. 공찬이야 과거 김동구였던 시절 자신을 믿어줬던 유일한 사람으로 수재를 기억한다지만.. 도도하고 단단한 껍질을 가진 수재가 공찬에게 마음이 열리는 것이 너무 순식간인 것 같았달까. 하지만 또 곰곰 생각해보자면, 긴 시간 퍽퍽하고 건조한 곳에서 물 한모금이 간절했던 사람이라면 그런 과정이 가능할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걸 다 가진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외로웠고, 가끔은 꼭 그들의 모습처럼 변화하는 자신의 모습을 수재 스스로조차 믿지 못하는 순간이 있었다면. 그렇다면 덮어놓고 무조건 자신을 믿는다 말하는 한 사람의 존재가 모든 경계를 무너뜨릴만큼 간절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믿음'.
생각보다 이 단어는 아주 큰 힘을 갖는다. 누군가를 오롯이 믿는다는 것은 아름답고도 위험한 일이다. 과거의 수재는 세상을 믿었고 사랑을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의 대가로 가장 밑바닥까지 떨어졌다. 이제 수재에게 '믿음'은 시리고 아픈 단어로 남았다. 그런데 그 단어를 밑도 끝도 없이 저에게 들이미는 누군가가 나타난 것이다. 다시금 '믿음'이란 단어에 희망을 걸고 싶을만큼 진실한 얼굴로 그 애는 말했다. 당신을 믿는다고. 아무런 조건없이, 그저 당신이기에 믿는다고.
수재는 그게 자신이 과거 찬에게 건넸던 믿음의 결과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자신이 찬에게 주었던 유일한 믿음이 지금껏 찬을 버티게 했다는 걸. 누구도 자신의 무고함을 믿어주지 않을 때 제 손을 잡아주었던 딱 한 사람을 찬은 잊지 않고 있었다. '오수재'라는 이름의 국선변호사. 엉망인 나를 '믿는다'고 말했던 그 사람을.
어떤 믿음은 사람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기도 하지만, 어떤 믿음은 누군가를 살게도 한다.
한 때 김동구를 살렸던 수재의 믿음은 시간을 돌아 '공찬'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되돌아왔다. 모든 것을 잃은 수재에게, 유일하게 믿을만한 친구에게조차 마음으로 온전히 기대지 못했던 수재에게, 찬은 뜻밖에 위로와 격려로 훌쩍 곁에 다가선다.
'당신을 믿는다'.
가끔 혼자 뚝 떨어진 기분이 들 때, 모두가 나를 제멋대로 판단하고 내 진짜 얼굴을 마음대로 재단할 때. 그러나 그것에 대해 변명을 하는 것도 바로잡는 것도 의미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누군가 진심으로 '믿는다'는 한 마디만 해준다면 우리는 두 발로 땅을 디딜 수 있다. 내가 쥐어준 믿음을 진창에 내던지는 사람이 있다해도, 그 진창에 기꺼이 손을 넣어 다시금 '믿음'이라는 단어를 꺼내줄 한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우리로서 살아갈 수 있다.
과연 이 '믿음'은 드라마가 진행되는 동안 인물들 사이에서 어떤 작용을 할까. '동구'의 동생 나정을 죽인 진범에 대해 수재는 과연 알고 있을까, 모르고 있을까. 숨겨진 과거가 전부 드러난 이후에도 이들은 서로를 간절히 믿을 수 있을까.
* 본 리뷰는 필자의 감상을 바탕으로 쓰였습니다.
* 드라마에 인용된 사진과 대사의 저작권은 해당 작품의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