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일이든 혼자 삭이는 것이 더 익숙했던 때가 있었다.
미정은 그렇게 모든 순간 입을 꾹 다물고 버텼다. '버텼다'라는 표현이 적절한지도 잘 모르겠다. 그냥 그런 일이 벌어졌으므로 벌어지게 두었고, 누군가 그런 말을 뱉었으므로 그냥 뱉게 두었다. 그런 일에 일일이 반응하고 싶지 않았다. 되도록 단정하게 그 시간들을 견뎌내고 싶었다. '의지'라기 보단 선택이었다. 그녀는 풀어내고 쏟아내는 쪽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어쩌면 그래서, 삶은 그토록 불편하고 부족하고 권태로웠던 걸까.
적당히 버티고 적당히 웃으며 지내는 동안 미정은 스스로의 영혼이 조금씩 흐릿해져간다고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연기처럼 형태도 없이, 색깔도 없이, 향기도 없이. 그렇게 조금씩 소멸해가고 느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어느 날 불쑥, 저처럼 연기인듯 흐릿하게 머무는 구 씨에게 '추앙'이라는 단어를 건넸던 건지도.
서로를 응원하고, 서로를 쉬게 하고, 그래서 서로를 가장 서로답게 만드는 존재를 찾기 위해.
그건 상대를 애타게 하고 싶지 않다는 기정의 말과도 닮아있다. 그들은 설레기 위해서 상대를 마음에 담지 않는다. 롤러코스터를 탄듯 감정의 오르막 내리막을 겪는 연애를 원하지도 않는다. 세상도 어지러운데 사랑에서까지 멀미하고 싶진 않았으니까. 다만 그들이 바라는 것은, 내가 '나'인 채로 있어도 괜찮은 존재다.
조금 어설퍼도 괜찮고, 조금 부족해도 괜찮고. 꼭 좋은, 갖추어진 모습을 보이지 않아도 괜찮은. 그리하여 나 역시 그 사람의 밑바닥마저 끌어안게 되는 그런 관계. 그래서 미정에겐 구 씨의 지나간 인생도 이름도 나이도 중요하지 않았다.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 나는 당신을 추앙할테니까. 당신의 바닥이 무엇이든, 나는 감당할 자신이 있으니까.
사방이 적이라고 생각했던 구 씨에게 그런 미정의 태도는 희한한 위로가 되었고, 어느 순간 꽤 편안한 안식처가 되었다. 잘못 내려서 정착한 이 '산포시'에서 구 씨는 어쩌면 그렇게 자기의 진짜 얼굴을 찾아갔는지도 모른다. 가로등 불빛이 다 꺼진 순간 진짜 달빛이 모습을 드러냈던 것처럼, 인생의 모든 불빛이 다 꺼진 순간 제 안에 있던 '진짜'가 모습을 드러냈던 건지도.
그 달을 미정과 함께 볼 수 있어서 그는 좋았다. 어쩌면 '행복'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왜일까. 행복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그 행복이 짙어질수록 불안해지곤 한다. 그는 지금껏, 적을 경계하기 위해 사방이 탁 트인 공간에 머무는 들개처럼 살아왔다. 단 한번도 안정적이고 편안한 행복을 누려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 미정과 있는 시간이 좋을수록, 이 산포시에 마음을 두게 될수록 그는 한편으로 두려웠던 것이 아닐까.
어디선가 갑작스럽게 나타난 불행이 지금의 이 행복을 다 물어뜯어 놓을까봐.
그렇기에 어쩌면 그는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잃을까봐 불안할바엔 차라리 이 삶으로부터 분리되는 편이 낫다고. 이곳을 떠나 다시 본래의 삶으로 돌아간다면 적어도 어딘가엔 그런 삶이 있었지, 생각하며 살 수라도 있을테니까.
차라리 미정이 지겨운 여자였더라면, 뻔한 여자였더라면, 구 씨는 보다 쉽게 그녀와 함께 하는 삶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정은 언제나 구 씨가 예상하지 못한 대답과 반응을 내놓는 사람이었다. 추앙하면, 가득 채워지면 뭔가 달라질 거란 말에 기대를 걸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가득채워져 자유로워지는 일이 이렇게 따뜻하고 이렇게 두려운 일인지 그 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렇다. '해방감'이라는 단어에는 복합적인 감정이 녹아있다. 자유는 행복만큼이나 거대한 불안을 몰고 오기도 한다. 하늘에 붕 떠있는 기분이라는 건 반대로 발이 땅에 닿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니까.
창희는 제 것이 아닌 구 씨의 차를 몰고 다니며 한동안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내 것이 아니기에 불안하면서도 운전대만 잡으면 마음이 온화해진다고 그는 말했다. 구 씨에게는 미정이 그런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나를 가장 온화하고 다정하게 만드는 사랑스럽지만 낯선 존재. 그래서일까. 차에 흠집이 나는 순간, 창희와 구 씨는 각자가 외면했던, 달아났던 세계로 돌아간다. 원하던 것과는 판이하게 결이 다른 각자의 현실로.
이상과 현실은 대체 뭘까.
롤스로이스는 창희의 이상이자 구 씨의 현실이다. 산포시는 구 씨의 이상이자 창희의 현실이다. 우리는 각자 이렇게 다른 지점에서 다른 것을 갈구하고 원하며 산다. 그렇다면 나를 가득 채울 수 있는 것은 둘 중에 무엇일까. 내가 무엇을 원하느냐에 따라 다르다고밖에 답할 수 없는 걸까.
어쩌면 질문이 잘못된 건지도 모른다. 우리가 정말로 해방되는 순간, 가득 채워진다고 믿는 순간은 그것이 이상이냐 현실이냐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그저 이상이든 현실이든 두려움없이 그것 앞에 맞설 수 있을 때. 드라마 초반에 미정이 했던 말처럼 눈 앞에 놓인 것을 '뚫고 나갈 때' 가능해지는 것인지도.
내가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의 후반부에 기대하는 것은 그런 모습이다. 난 미정과 구 씨가 반드시 서로와 함께하길 바라지도, 창희가 외제차가 아닌 자기 현실에 있는 충만함을 찾게되길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그게 무엇이든 눈 앞에 놓인 것을 그들이 뚫고 가길. 붙잡는 것이 무엇이든 그들이 자유롭길. 두려움없이 행복하고, 거리낄 것 없이 웃게 되길 고대할 뿐.
혹시 드라마는 우리에게 이런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닐까. 인생은 그다지 길지 않으니 어디에도 묶이지 말고 자신의 삶을 살라고. 다가올 불행이 두려워 눈 앞의 행복을 놓치지도 말고, 너무 먼 곳을 보느라 가까이에 핀 꽃을 외면하지도 말고. 그저 두려움 없이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을 찾아 가장 바라는 지점에 가닿으라고. 오롯이, '해방된' 존재로서.
* 본 리뷰는 필자의 감상을 바탕으로 쓰였습니다.
* 본 리뷰에 인용된 드라마관련 사진과 대사의 저작권은 해당 작품의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DRAMA REVIEW' 카테고리의 다른 글
[드라마리뷰] 나의 해방일지 14회 - 추운 삶들이 서로를 끌어안는 순간 (0) | 2022.05.27 |
---|---|
[드라마리뷰] 나의 해방일지 13회 - 애쓰지 않아도 우리는 언젠가 떠나 (0) | 2022.05.22 |
[드라마리뷰] 나의 해방일지 9회 10회 - 이 겨울이 지나가면 (2) | 2022.05.18 |
[드라마리뷰] 사운드트랙 #1 1회 - 나의 '진짜'는 여기에 (0) | 2022.05.16 |
[드라마리뷰] 나의 해방일지 7회 8회 - 당신의 유년에 나란히 앉아 (2) | 2022.05.13 |
댓글